◀ 앵 커 ▶
광복 81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독립유공자 훈장이
수천 개에 이릅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유공자들의
공적이 뒤늦게나마 인정되고 있지만,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윤소영 기자의 보도입니다.
◀ 리포트 ▶
영암 구림마을 앞에 우뚝 선
높이 10m의 기념탑.
1919년 이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울려 퍼진 나팔 소리를 신호로
일대 주민 1천여 명이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 st-up ▶
"바로 이곳에서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영암읍까지 행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주민 25명이 체포됐습니다."
당시 37살이던 정상조 선생도
만세 시위를 이끈 사람 중 한 명.
학생들의 시위를 인솔했다는 이유로
태형 90대라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80여 년이 흐른 뒤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지만,후손을 찾지 못해 아직 전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 INT ▶최태근/영암 구림청년계장
"그 당시에는 일본에 의해서 압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좌익이라든가, 우익이라든가 이런 것도 있었고, 친일파 이런 것도 있고 그러니까 서로 말을 못 한 거죠."
전국적으로 아직 후손을 찾지 못한
독립유공자는 7천6백여 명,
전남광주에서는 286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훈장이 후손의 품으로 돌아간 사례도 있습니다.
때는 1929년 11월.
목포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반발해
목포역 앞까지 행진하며
대대적인 항일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17살이던 고 김복동 선생도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계획했지만,
거사 전 일제 경찰에 발각됐습니다.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일제의 감시 속에 살아야 했고,
지난해에야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김 선생이 세상을 떠난 데다
후손의 소재도 확인되지 않아
포상 소식조차 전하지 못하다가
올해 보훈 당국의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캠페인을 통해 가족의 존재가 확인됐고,
자녀들은 뒤늦게 아버지의 훈장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 SYNC ▶김영기/고 김복동 선생 자녀
"자기의 일을 갖다가 떠벌리고 막 이런 분이 아니셨거든요. 막상 이번에 이제 알고 나니까 굉장히 영광스럽고 또 자랑스럽죠."
하지만 여전히 독립유공자 10명 가운데 4명꼴로
포상이 후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공훈전자사료관에서
미전수 포상자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며,
후손들의 적극적인 확인을 당부했습니다.
MBC 뉴스 윤소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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